야인시대 / 명동파 보스 이화룡, 충청로 도끼사건
방송연예/야인시대

야인시대 후반에 명동파 보스로 등장하는 '이화룡'

이화룡(1914년~1984년)은 평안남도 평양 출생으로 일제 강점기부터 8.15 광복가지 평양과 북한 지역에서 '박치기 왕'으로 불리며 이북을 평정했었습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박치기 당하는 모습은 안보이는데 쓰러지는 모습은 보인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굉장히 빠르고 강한 박치기를 구사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화룡은 '박치기왕' 이라는 별명 뿐 아니라 '명동백작', '검은 신사' 등 수많은 별명이 있습니다.

이화룡은 해방 후 북한에서 공산주의 바람이 불자 공산주의가 싫어 정팔과 함께 명동으로 향합니다. 명동으로 향한 이화룡과 정팔 등은 명동에 성공적으로 정착합니다.

▲야인시대 중 / 좌측 부터 황병관, 이화룡, 맨발의 대장


야인시대에서 이화룡이 명동에 처음 왔을때 김무옥, 김두한과 마찰을 빚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계기를 통해 이화룡은 김두한과도 친분을 맺게 되었고 명동파의 세력은 더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특히 이화룡은 동대문파의 이정재 등과 달리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조직관리와 세력을 넓히는 대에 집중하였는데 1958년 '충청로 도끼사건' 으로 조직이 와해되었습니다.

충청로 도끼사건

1958년 명동파의 영역에 누군가가 청산가리를 투척하고 사라졌다. 이 소식을 들은 이화룡은 노발대발하였고 적대관계에 있었던 동대문파를 범인으로 확신한다. 그리고 종로의 아오마스 심종현 등 동맹관계의 있었던 모든 조직의 주먹들을 모아서 도끼와 쇠파이프, 낫, 칼 등으로 무장하여 보복에 나선다. 이들은 동대문파의 간부들의 집으로 처들어가는데 이 소식을 미리 알게된 동대문파의 유지광이 머리를 써 모든 동대문 간부들을 피신 시켰고 무기를 든채로 모여있던 명동파 조직원들은 경찰의 검문을 받게 되었는데 지레 겁먹은 명동파 조직원이 경찰을 폭행하였고 다른 조직원이 도망가던 경찰에게 도끼를 던져버린다. 경찰은 다행이 도끼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경찰이 대대적인 명동파 검거에 나서게 된다. 그때 증거물로 채택된 것이 바로 도끼이다. 이 모든 일은 정치에 깊게 관여되어 자유당 정권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던 동대문파의 계략이었다. 이 일로 명동파의 이화룡, 정팔, 오상사 등 핵심 간부들이 모두 징역형을 선고 받고 조직이 와해되었다.

하지만 훗날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고 정치깡패들을 소탕하기 시작하였는데 자유당의 앞잡이로 활동하였던 동대문파 조직원들과 이정재 등은 사형을 당하였고 명동파 식구들은 사형을 면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1960년 이화룡은 명동파를 오상사로 불리는 신상현에게 물려주고 영화계로 뛰어 든다. 이화룡은 '화성영화사'를 차려 영화사업에 몰두 하였는데 이때 제작한 영화들로는 박서방, 주마등, 마부, 임자 없는 나룻배, 장희빈 등 작품성이 높은 쟁쟁한 영화들을 내놓았다. 그리고 1967년 화성영화사는 등록이 취소되었고 훗날 이화룡은 1984년 2월 24일 0시 56분 서울 혜화동 고대 병원에서 고혈압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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